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워드로스 2세 (문단 편집) === 외교 무대에 나서다 === 기존의 에티오피아는 외교와는 거리가 먼 전근대 국가였다. 먼 거리에 있는 국가와는 교류할 이유도 여력도 없었고, 가까운 데 있는 국가 중 에티오피아와 겨룰 만한 국력을 갖춘 국가는 이집트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관의 시대 말기에 우베 하일레마리암 등 일부 지방 귀족들이 세력 확장에 도움을 받기 위해 유럽 국가들과 접촉하려 했다. 테워드로스 2세 역시 이런 경향을 이어받아 여러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트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외교를 위한 노력에는 장애물이 너무도 많았다. 첫째는 황제가 유럽 내의 외교 관계를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열린 사람이라고 해도 에티오피아 국내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고, 테워드로스 2세는 유럽 국가들 간에 복잡한 외교적 균형 관계가 있다는 것과 종교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테워드로스 2세는 에티오피아가 기독교 제국이며 이교도 이집트와 성스러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같은 기독교도로써 지원해달라는 논조의 편지를 보냈으나, 이런 논리는 유럽 국가들에게 별로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황제는 [[크림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했다고도 한다. 이교도 [[오스만 제국]]과 기독교 국가인 [[영국]], [[프랑스]]가 협력하여 기독교 국가인 [[러시아 제국]]을 친다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유럽 국가들의 인종차별적 경향이었다. 이때는 아직 에티오피아가 유럽 국가들의 인정을 받기 전이었고, 유럽 국가들에게 테워드로스 2세는 그저 아프리카의 수많은 우가우가 부족장들 중 하나로 보일 뿐이었다. 당연히 그를 외교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국가 자체가 거의 없었다. 셋째로, 이러한 인종차별적 경향 때문에 각국 외교관들도 제대로 일하지 않았다. 황제의 뜻이 유럽 국가들에게 잘 전해지지도 않았고, 심지어 곡해되어 전달되기도 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민간 상인들을 통해 무기 수입을 어느 정도 해낸 것 말고는 외교적 성과를 얻기 어려웠다. 가장 에티오피아를 친밀하게 대했던 국가는 러시아였다. 당시 러시아는 영국을 견제하고 싶어 국력이 닿는 만큼 해외에 세력권을 넓히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러시아가 [[크림 전쟁]]에 휘말리면서 약속했던 무기, 기술 지원이 전면 중단되어버렸다. 지원 중단 소식을 들은 테워드로스 2세는 새롭게 주조한 대형 대포에 [[세바스토폴]]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러시아가 보여준 마음에 감사를 표했다. 반면 프랑스는 외교 관계 수립의 조건으로 황제가 싫어하는 가톨릭 선교 전면 허용을 내걸었다. 이는 사실상 외교 관계 수립 거부나 다름없었다. 가장 외교 관계가 많이 진척된 국가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비교적 덜 인종차별적으로 외교를 하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또 황제는 어릴 때부터 영어 공부를 하고 셰익스피어를 읽는 등 개인적으로 영국을 좋아하기도 했다. 적지 않은 영국인들이 에티오피아에 입국했고, 이 중 영국 공사 월터 플로든과 무역상 존 벨은 황제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황제는 이 두 사람이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영국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지만, 영국 정부는 에티오피아와 거리를 두면서 관계를 냉정하게 설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영국은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치르는 중이었는데, 영국 눈에 에티오피아는 [[친러]] 국가였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집트와는 대놓고 전면전을 벌이진 않았지만,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이집트와 대립각을 세우고 분쟁도 자주 했다. 1854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릴로스가 에티오피아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에티오피아 총대주교 아부네 살라마와 만났다. 당시 테워드로스 2세는 아직 즉위 전에 귀족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아부네 살라마는 그를 위해 이집트군을 동맹으로 끌어들이려고 했고, 키릴로스는 이 뜻에 동의해 이집트에 돌아가서 군주 이브라힘 파샤에게 에티오피아에 군대를 보내줄 것을 부탁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를 알게 된 테워드로스 2세는 노하여 키릴로스를 잡아 가두었다. 키릴로스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 간의 외교 관계를 주선하려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에야 1855년에 석방될 수 있었다. 또 황제는 수단 지역의 반란을 지원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